서촌의 기억
평소 보기 힘든 한옥이 줄지어 있고 중간중간 리모델링 된 한옥카페가 들어서 있는,
걷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념에 젖어들게 되는 서촌의 한복판으로 한때는 매일 출근을 한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무렵 서울구경을 가자고 친구들과 약속하고 눈을 반짝이며 걸었던 그 길을
20년 후 아무 생각 없이 의무감으로 지나는 것은 야속한 세월에 변한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낯설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다니던 직장에서 '서촌을 걷는다.'라는 책을 읽고,
옛지도의 청계천 물길을 따라 서촌일대의 흔적을 돌아보며 역사적 사건 혹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책을 책 좀 읽자는 마음 하나로 아무런 대가 없이 영세한 월간지의 도서코너에 소개했었다.
'서촌의 기억'을 읽기 전까지 나에게 있어서 서촌애 대한 기억은 이 정도였다.
그리고 2년 후 "그 책 재밌어요." 아이와 책을 고르고 데스크 앞에 진열된 책을 집어 들자
아파트 작은 도서관 자원봉사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간만에 재밌는 소설 좀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빌려온 책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재미있었다.
첫사랑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
목가구 작가인 주인공 태인은 극 I의 성격을 가진 청년이다.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혼자 살게 된 그는 재산의 절반을 털어 전쟁 후 계속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서촌의 오래된 주택으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작업실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하던 중 집의 외양간 자리에 위치한 방공호에서
부치지 못한 217통의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1950년, 연희대학교에서 시를 전공하던 구자윤은 친구들과 전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중 그곳에서 일하는
여인 수희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해 1월부터 12월까지... 역사적 비극이 있었던 그 해의 아픔과 함께 문학을 논하던 친구들과의 우정,
끝내 전하지 못한 그의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217통의 편지에 담겨있었다.
한때 태인에게도 좋아했던 여인이 있었다.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꽃 피우지도 못한 고등학생 시절 그에게 다가왔던 첫사랑 정연은 수능 국어문제에
출제된 소설지문 작가의 항의로 정답이 바뀌면서 절망감에 세상을 등진다.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태인은 점점 자신을 세상과 고립시켜 왔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전쟁으로 방공호에 숨어 지내면서도 여인에 대한 숭고한 마음과
그리움으로 편지를 이어갔던 구자윤에 대한 애잔함에 태인은 무작정 편지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한 여행에 나선다.
여행에서 만난 자윤의 친구는 소설 '패잔병'의 작가 정선우.
고집스럽게 수능문제의 정답을 바꾸면서 그 해 7명의 학생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태인도 잊을 수 없었던 그 작가였다.
이제는 고령이 된 작가와 구자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태인은 그가 왜 수능 정답을 바꿨어야만 했는지 이해하게 되고
작가는 오래전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돌아서던 자윤을 편지로나마 다시 만나게 된다.
결국 선우의 도움으로 편지는 수희에게 전달되고 그녀 또한 편지를 통해 삶을 위로받는다.
전쟁이라는 비극
1950년 6월 25일 역사적 비극이 시작된다.
일요일에는 물놀이를 가겠다며 설레어하던 자윤에게 찾아온 그날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만이 남게 되었다.
가벼운 해프닝쯤으로 끝나겠지... 했던 전쟁은 점점 삶 속으로 침투했고 인민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면
한 몸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방공호에 몸을 숨겨야 했다.
옆방에서 같이 하숙하던 친구는 길에서 목숨을 잃었고 친구를 잃은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살아있다고 안도해야 했다.
본인이 도망갈 시간을 끌기 위해 대통령은 다리를 폭파했고, 피란길에 합류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친구는
결국 인민군에게 끌려가 전쟁터에서 또 다른 친구를 적군으로 만난다.
한 민족끼리의 전쟁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스마트폰 하나면 뭐든 할 수 있고 AI가 상용화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전쟁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위협 아래에 놓여있다.
하물며 이웃나라에서는 실제로 미사일과 포탄이 오가고 있으니 70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도 없겠다.
무너져 내리는 아파트, 부모를 잃고 울고 있는 어린아이, 길게 줄지어 선 피란민들의 모습을 보며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취해야 할 이익이 무엇인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우리는 충분히 가졌고 충분히 편한 생활을 하고 있고 충분히 행복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