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읽고자 했던, 그리스인 조르바
시골의 작은 중학교 도서부 일원으로 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막 시작되던 사춘기 시절 어른들이 많이 읽는 책으로 인기도서 순위에 있던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에게 당장 읽을 엄두는 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로망 같은 책이었다.
그 후로도 도서관에서 혹은 서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날 때마다
갚지 못한 빚처럼 체증을 느끼면서도 막상 집어 들지는 못했던 그 책을
두 달 전쯤 중고서점에서 구입하고는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생각했던 것보다 읽기가 어렵지는 않은데?'였다.
이 책과 비슷한 시점에 읽기 시작한 총 균쇠의 진도가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데 비해
역시 소설은 지루함과 거부감 없이 책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데에 대한 즐거움이 있었다.
다만 내가 작가의 깊은 통찰을 이해했는가... 하는 것은 논외로 하겠다.
책을 읽기 전부터 가졌던 조르바에 대한 호기심은 읽는 내내
그의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그리스의 대문호에게 니체와 베르그송만큼이나
큰 영향을 주었다는 실존인물 조르바는 전쟁으로 갖가지 험한 일들을 경험하고
카사노바 같은 여성편력을 가진 마초적 성격의 노인으로 작가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인간의 욕망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하면서도
언제나 본질적인 것에 대해 묻고 번민하는 조르바의 모습에 감동을 느낀 듯하다.
항상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지성인의 상식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필요시 두려움 없이 앞장서서 나서는 조르바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실제로 여행이 삶의 일부였던 작가가 여행 중 만난 아름다운 여성과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한 후 유부남인 자신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한다는 깊은 자의식 속 죄책감 때문에
얼굴에 발진과 진물이 나는 의문의 병을 얻었던 그로서는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조르바를 충분히 동경했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p.215
세상 사람 모두가 조르바 같기만 하다면 혼란이 끊이지 않겠지만
때로는 우리도 꽈당 부딪치는걸 두려워하지 않는 깡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스인 조르바 줄거리
지식인으로 살던 중 크레타 섬의 갈탄광을 빌려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작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조르바라는 노인을 만난다.
마침 전에 광부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는 조르바는 작가에게 동행을 제안하고
그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든 작가는 그와 함께 크레타 섬에서
갈탄 채취를 시작한다.
일을 할 때 조르바는 더없이 진지하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일꾼들을 호령하고 광맥도 잘 찾아낼 뿐만 아니라
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광산이 무너질 때 사람들을 재빨리 피신시키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전혀 우쭐해하거나 거만하게 굴지 않는 담백함을 가진 사람이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아끼는 산토르를 켜며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조르바는
여기저기 흘러 다니며 인생을 즐기며 살아왔다.
그의 인생은 수없이 많은 여자와 함께 했으며, 대부분이 과부였다.
언제나 조르바는 자신에게 과부를 외롭지 않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이곳에서도 가장 먼저 과부를 찾아 나섰는데
이때부터 낡고 허름한 호텔을 운영하는 오르탕스 부인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왕년에 많은 애인을 두고 잘 나가던 그녀는 이제 화장을 덕지덕지 한
늙은 여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직도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기에 조르바와의 결혼을 염원했고 가여운 그녀를 차마 실망시킬 수 없어
조르바는 그녀와 간소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오르탕스 부인의 행복도 잠시... 가벼운 감기로 시작된 그녀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결국 그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설은 오르탕스 부인과 또 다른 마을의 젊은 과부의 죽음을 등장시키며
'죽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젊은 과부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마을 청년의 복수를 하겠다며
한꺼번에 덤벼들어 과부를 살해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조르바는 분노하고 작가는 허탈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잊으려 하고 이런 사람들 모두에게 '살인자'라며 경멸하는 덜떨어진 미미코의
모습을 통해 살인을 하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는 마을 사람들과
친했던 과부의 죽음을 가슴 아파하는 덜떨어진 미미코를 대비시키며
이들 중 누가 정상적인 사람인지 의문을 갖게 만드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두 부인의 죽음을 통해 보게 되는 인간의 민낯과 타락한 수도승들의 위선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도르래 건설의 실패로
결국 망하게 되는 갈탄광의 몰락을 마지막으로
작가와 조르바는 크레타 섬에서 떠나 헤어지게 되고
헤어진 후에도 가끔 서로의 안부를 편지로 주고받지만
조르바가 죽기 전까지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하지 못한다.
소설의 형식이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를 글로
옮긴 것이므로 글은 마치 작가의 기행문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조르바의 대범함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사랑은 작가가 책으로는 배울 수
없었던 것이었기에 작가에게 조르바가 여행 중 그저 스쳐간 사람이 아닌
존재로 남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저자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출판
- 열린책들
- 출판일
- 2009.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