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생애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한 화가 이중섭은
원산에서 '백두상점'이라는 백화점을 경영하던 형
이중석의 지원을 받아 1936년 도쿄에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유학한다.
그곳에서 함께 미술을 배우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게 되고 후에
한국에 있는 그를 홀로 찾아온 그녀와 1945년
5월 결혼하는데 중섭은 그녀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뜻으로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2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오게 되고 잠시 떠난다고 생각했던 원산은
영영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만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해본 적 없던 이중섭은 아내의 재봉질로
끼니를 연명해 가다 함께 월남했던 조카가 있는
제주도로 이주한다.
제주의 추위는 부산보다는 덜했지만
그곳에서도 딱히 그들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피난민이 받을 수 있는 배급과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거나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어 끼니를 때우며
힘들게 생활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후에 그가 남긴 그림을 보면
가난해도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서귀포에서의 삶이 그에게는 낙원과 같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52년에는 장인의 부고를 듣고 건강이 나빴던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며 가족 간에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듬해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그도 일주일간 일본에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는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는 대작을
그리더라도 이름을 내걸 수 없다는 현실에 훗날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린다.
그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너무나 절절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공예가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을 그리는 일에 매진한다.
그가 가족을 떳떳하게 다시 볼 수 있는 길은
성공적으로 개인전을 치르고 작품을 팔아
돈을 모으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황소나 흰 소도 이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영에서의 생활도 길게 가지는 못했다.
그를 지지하며 동고동락하던 유강렬이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도 함께
통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후 서울에서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몇 번의 전시회를 열지만 일본으로 가는데
필요한 돈을 만들지는 못하고 영양실조와 거식증,
간염 등으로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을 통해 이중섭의 삶을 엿보다.
소설가 김탁환은 이중섭이 남으로 피란 온 이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의 삶을 재현시킨다.
남으로 내려온 후 그나마 가장 평온한 삶을
살며 그림에도 매진할 수 있었던 통영은
그에게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안식처였다.
가족을 일본에 남기고 홀로 귀국하는 배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다짐을 했을까...
일본으로 돌아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고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대작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밤을 새워가며
그림을 그리는 그의 모습은 소설이 아닌
사실 그대로였으리라...
풍경화 한 점을 그리더라도 몇 번씩 산을 오르며
구도를 바꿔보고 소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몇 날 며칠 이 마을 저 마을의 소를 지켜보던 그는
통영의 서피랑에서 강구안을 바라보며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을 그리고
소싸움을 보는 동시에 스케치를 이어가며
'싸우는 소'를 그린다.
그림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들이
허구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가 바라보던 그곳을 지금 우리가 바라볼 수
있고, 그가 남긴 그림을 그가 떠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고,
캔버스 한번 사용하지 못하고
종이가 없으면 담뱃갑의 은지에, 때로는
장판에라도 그리던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에 감탄할 뿐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중섭의 제자 남대일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제로도 그에게는 제자가
한 명 있었다.
원산의 이중섭의 화실에서 4년 정도 그림을 배운
김영환 화백은 남대일이라는 인물과 교차점은
없지만 그의 하나뿐인 제자라는 점에서 소설을
읽는 내내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일본에서 초현실주의를 배운 이중섭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전쟁 전후로 초현실주의 회화를
선보이며 그만의 화풍을 개척한 화가로 발돋움했다.
반면, 소설 속 이중섭의 제자 남대일은 가난한 선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를 가르치려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사춘기 소년으로
어렵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에서 생활하며 이중섭의 내제자를 지내는
인물이다.
소설에서는 이중섭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의 내면을 독자에게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끄는
인물이기도 해 작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역할이라 생각된다.
소설은 서울에서 개인전을 여는 이중섭을
돕기 위해 남대일이 상경을 하고 그토록 원하던
개인전이 시작되면서 마무리된다.
개인전 이후 생각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를 느꼈을 이중섭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은
화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작가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시대적 비극이 낳은 비운의 화가
이중섭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소설이다.
2027년에는 제주도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이
확장된 모습으로 재개관한다고 하니 1등으로
달려가야겠다.
#통영 #봄날의책방 #김탁환소설 #이중섭소설 #남해의봄날 #참좋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