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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통찰, 이반 일리치의 죽음

by 타임러너 2024. 9. 22.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생애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 귀족 집안의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2년 후 그의 어머니는 여동생을 출산하다가 사망한다.

그로부터 7년 후에는 아버지 니콜라이가 뇌출혈로 급사하고 일 년 후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청소년기에는 그가 가장 의지했던 고모마저 돌아가셨는데 이러한 비극적인 가정사는

톨스토이가 그의 작품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69년 발표한 [전쟁과 평화]로 작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877년 출간한 [안나 카레리나]는 인간의 존재와 감정에 대한 복잡한 묘사와 

도덕적 갈등에 대한 심오한 탐구라는 평을 받으며 여전히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죽음에 대해 민감함을 가지고 있던 그는 생애 후반부에 특히 이러한 주제에 몰두하였는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고민과 함께 죽음을 인생의 중요한 문제로 여긴 그는 

여러 작품과 에세이에서 죽음의 불가피성과 개인의 존재에 대한 고뇌를 성찰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반영하였다.

 

그는 또한 사회의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인생의 가치를 물질적 성공이 아닌 도덕적인 삶에 두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의 후반부 작품에서는 개인적 신념과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게 얽혀 나타나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서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년기 톨스토이의 가정사는 그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소설은 특이하게도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4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불과 3개월의 투병생활 끝에 생을 마감한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장에서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 그의 아들 정도뿐이다.

평소 절친했던 그의 동료들은 고등법원 판사였던 그의 자리에 후임으로 누가 배정될지와

오늘 밤 하게 될 카드게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고 이제 막 미망인이 된 그의 아내마저도

가식적인 눈물을 쏟으며 그녀가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돈에 대한 걱정뿐이다.

 

죽음은 당사자에게만 비참하고 서러운 것이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그저 잠시 스쳐가는 안타까움만으로 남게 됨을 소설에서는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남은이들의 상황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닥친 것은 혼기가 찬 딸을 결혼시켜야 하는 일과 아직 어린

아들을 잘 키워야 하는 것이니 그녀가 걱정할 것은 이미 죽어버린 남편보다는 

경제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슬퍼하는 최소한의 마음과 시간마저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2장에서부터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서사가 펼쳐진다.

젊은 시절부터 귀족집안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나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던 그는

자신의 수준과 조건에 맞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고,

고등법원의 판사자리에 올라 다른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 남들이 보기에 부러워할 만한 집을 장만하고 

자신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의 생활을 흉내 내며 화려하게 집을 꾸미는 일에 열중한다.

커튼을 다는 세심한 일에까지 하나하나 다 신경을 쓰던 중 그는 낙상사고를 당하게 되고

떨어지면서 다친 옆구리의 미세한 통증이 점차 커지면서 고통스러운 투명생활이 시작된다.

 

죽음에 대한 통찰  

저명한 의사들을 여럿 찾아가 보아도 그의 병에 대한 뚜렷한 해법은 찾을 수 없다.

지독한 통증 앞에서 그는 더 이상 판사도 귀족도 아닌 그저 힘없는 환자였고 

그를 치료하는 의사는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가식덩어리에 불과하게 느껴지며

병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의사에게서 그는 판사로서의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의사의 권위 앞에 나약한 환자인 그는 그의 판결을 기다리던 피고와 다르지 않았다.

 

날로 고통이 심해지며 아편에만 의지하던 그에게 위안이 된 이는 가족도 친구도 아닌

간병인 게라심 뿐이다.

젊고 활기 넘치는 게라심에게만은 화가 나지 않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며 편하게 기댈 수 있었다.

직업이나 나이를 떠나 몸이 아프면 그저 위로받고 보살핌 받는 어린아이가 되는데

본인을 판사나 아버지, 남편이 아닌 가여운 환자 자체로 대해주는 사람은

게라심 뿐이었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게라심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의 모습이 이해가 된다.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는 건강하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그의 옆을 맴도는

가족으로부터 증오심을 느끼던 그도 가족을 용서하고 화해를 구한다.

그의 고통만큼이나 남은 가족 또한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고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것에 대한 공포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탈출구이자

구원이었다.

그렇게 최후의 몸부림 끝에 그는 죽었다.

 

소설은 철저히 이반 일리치의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아픈 이를 보살펴야 하는

가족의 시점과 일상은 그의 시점과는 또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에게는 죽음이 해방일 수 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남겨지는 가족들의

아픔 또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저 소설을 읽는 내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되새길 수 있었다.